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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사회뉴스*:*♡

6.10 민주항쟁 우리에겐 아픈기억이죠!

by 후리지아향기♡ 2020. 6. 10.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픔이 있던
6.10민주항재를 기억하시나요?

전두환의 독재로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며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10 항쟁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에서 쓰이는

표현은 "6월 민주항쟁"인데요

6.10 민주항쟁

우리에겐 아픈기억이죠!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가 1년도 안되어

임기 중의 개헌이 불가능하니


현행 5공화국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특별

담화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요.

가뜩이나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열망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끌어냈는데요.
당시 대다수 국민은 직선제로의 복구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 선언을 계기로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였으며

1951년 자유당 결성으로 시작된 권위주의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요.

 

 

 

 

 

 

 

 

서구 수준의 민주주의가 쟁취되어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네요.

 

또한 평화적인 시위로 정권을 쫓아 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 받는 시민 항쟁이기도 합니다.

 

 1986년 인천 5.3 운동과 10.28~♥

건대항쟁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민중들은 혹한 속에 떨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억사건' 있었습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으며.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물고문과 함께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졌는데요.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 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었습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해요.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기에 전두환의

심판을 국민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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